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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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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교

도교(道敎: 봉남계)를 창립한 김덕태(金德泰)는 경상남도 울산에서 태어났다. 부산영도에 거주할 때 병이 있어 김봉남의 부인 박씨에게서 물법치료를 받고 효험이 있은 후로 봉남의 신자가 되었다. 봉남이 사망한 뒤 부산 동래구 온천동에서 환자들을 시술하면서 천지의 어머니인 태상노군(太上老君)이 자기에게 강림해 있다고 하면서 자신을 신격화시켰다. 그래서 신자들은 김덕태를 ‘천지어머니’라 신봉하였으며 한때 수백 명의 신도가 있었다. 법단에는 천지어머니라고 하는 노고(老姑)의 상을 모시고 있었는데 이 상은 김덕태의 얼굴과 흡사했다. 수련은 태상노군을 주송하면서 단식을 했고 이런 수련으로 환자들의 병을 고치게 했다. 참고문헌 : 『 ...

2025-06-30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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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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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

김덕명은 1895년 금구 용계에서 태어났다. 1886년 동학에 입도하고 그 해 10월 11일 경상도 상주의 화령 근처에 있는 전성촌으로 제2대 교주 최시형(崔時亨)을 찾아가 도를 받았다. 1887년에는 원평에 동학의 도회소(都會所)를 설치하고 포교에 힘썼다. 그는 교조신원운동 과정에서 원평집회의 주역이였으며 1894년 4월 무장봉기 이후 원평지역 농민봉기 황토현 전투에서 주도적 역할을 수행했다. 원평 전투의 패전으로 동학혁명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김덕명은 이후 금산면 장흥리 안정사동에 약 1개월간 숨어 있다가 붙잡혀서 서울로 압송되었고 1895년 3월 29일 전봉준·손화중·최경선·성두환(成斗煥)과 함께 처형되었다.

2025-06-30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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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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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광은 김항의 양자이다. 출생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김항의 사망 후 그의 의제(義弟)인 김두현(金斗鉉-김항의 아들)으로부터 김항의 유품 중 일부인 친필 수고본(手稿本) 『정역』과 『대역서(大易序)』를 받았는데 해방 직전인 1944년 일경에 의해 압수당하고 말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김항의 제자 중 한 사람인 진두월(陳斗月)을 따르면서 오랫동안 정역을 연구하였고 정역이론에 대한 강론을 곧잘 하였다고 한다. 1950년대 이필례는 ‘중앙대종교합십괘철학’의 간판을 걸고 전북 김제 만경에서 포교활동을 전개할 때 김덕광을 지도자로 모시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시 이 교단의 신자들은 역학적인 교리 연구에 뜻을 두는 이들이 ...

2025-06-30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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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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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

김대거는 11세에 원불교에 입문하고 16세에 출가하여 박중빈과 송규의 경륜과 포부를 받들어 실현하는 데 정성을 다했다. 1962년에 정산종사가 열반하자 법통을 계승하여 2월 23일 49세에 종법사로 추대되었다. 김대거는 교도들의 법위향상을 위한 훈련강화 삼동윤리 실현을 위한 해외교화와 종교연합운동 전개를 강조했다. 또한 교화3대 목표운동(연원달기·교화단 불리기·연원교당 만들기)을 추진하여 원불교 교세를 2배 이상 신장시켰다. 그는 재위기간 동안 한국사와 세계사의 흐름을 통찰하면서 변화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려고 노력했다. 1962년 10월 발표한 ‘신생활운동요강’은 새마을운동의 이념적인 토대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

2025-06-30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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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능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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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심교정원

김능복은 1940년 황해도 현성군 금산면 감수리에서 태어났다. 한국전쟁 당시 월남하여 익산군 함라면 신대리에 살며 초등학교와 중학을 졸업했다. 중학 2학년 때인 1969년 본원 창설의 원리인 「삼심대(三心大)」를 경험하게 되었다고 한다. 중학교 졸업 후 여러 종교를 편력하며 다니다가 군에 입대하여 1957년 제대하고 전북 익산군 함라면 신대리에서 윤불물십본지(圇佛物十本地:念佛宗)란 교명으로 문공부에 사회단체 등록을 했다. 그 뒤로도 원불교 · 통일교 · 삼각산 · 구복암 · 팔공산도덕암 · 대전기원정사 등을 돌아다니며 다른 종교의 교리사상을 섭렵하고 수양도 했다. 1978년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2025-06-30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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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낙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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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

김낙철은 33세(1890년)에 동생들과 함께 동학에 입도했고 이듬해 3월에는 공주군 신평리에서 호남도인 남계천 김영조 김낙삼 김낙봉(弟) 손화중 등과 함께 최시형을 배알하고 직접 지도를 받았다. 이 당시 부안지역에서 동학에 뛰어든 사람들은 무려 수천 명에 달했는데 이를 주도한 이들이 김낙철을 비롯한 부안김씨 문중 출신들이었다. 1893년에는 복합상소 운동에 참여했고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부안 대접주로서 부안에서 봉기하였다. 집강소 통치기에는 부안에 2개소의 도소(都所)를 설치하여 관내 치안유지에 기여하였다. 특히 이 당시 미곡을 구하러 온 제주도 어민들이 무사히 미곡을 구할 수 있게 도와줌으로써 1894년 ...

2025-06-30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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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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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산교오동정파

증산교오동정파를 창립한 김낙원(金洛元 1890-1973)은 1890년 2월 29일 전라남도 영광군 군남면에서 김응보(金應輔)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가 전라북도 부안군 해재면 송석리 속칭 봉리(峰里)가 길지(吉地)라 하여 그곳으로 이사하니 거기서 자랐다. 그의 부친은 치산을 잘하여 400여석을 받는 부농이었다. 김낙원은 지술(地術)을 잘 아는 김태수가 증산 강일순을 믿고 태을주를 읽어야한다는 말을 듣고 1915년 보천교에 입교했다. 1916년부터 손바래기에서 증산의 부인인 정부인을 3년간 모셨고 증산의 생전 제자들인 김형렬 등 5-6명과 친교를 맺으며 증산의 사상을 배웠다. 1918년 순천에서 안내성을 만나 함께 ...

2025-06-30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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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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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년 김광선(金光旋)을 통해 소태산(少太山)에게 귀의한 9인제자 중 한 사람으로 원불교 초기교단 형성과정에서 저축조합·방언공사(防堰工事)·혈인기도(血印祈禱) 등에 참여했다. 김기천 15세시에 김순천(金順天)과 결혼했으며 17세부터 한문 서당 훈장으로 근동 아이들을 가르쳤다. 김광선의 인도로 소태산 문하에 귀의하여 저축조합 방언공사 법인기도에 동참했다. 1924년(원기9)부터 4년간 영광지부 서무부장 겸 지부장으로서 살림을 전담했다. 1928년(원기13)에는 익산총부 서무부장에 피임되어 2년간 근무했고 1930년(원기15)에는 총부 교무부장 이듬해에는 선원 교무로 해박한 지식과 명철한 지혜로 선원들을 일깨웠다. 김기 ...

2025-06-30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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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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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로법회

금강산 건봉사(乾鳳寺)의 포교사로서 1925년 중앙포교원(中央布敎院 당시 경성부 이화동 1)에 부임한 김기선(金基瑄)은 매월 24일 관음제일에 모인 신자들을 중심으로 감로법회를 조직하였다. → 감로법회 참조 참고문헌 : 『朝鮮の類似宗敎』(村山智順 朝鮮總督府 調査資料 第42輯 1934)

2025-06-30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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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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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로법회

925년 감로법회를 창교한 인물이다. 그는 원래 금강산 건봉사(乾鳳寺)의 포교사였다고 하며 동사의 중앙포교소(당시 경성부 이화동 소재)에 재임 중에 매월 24일 관음제일에 모인 부인들을 주축으로 감로법회를 조직하였다. 이외에 자세한 행적은 전하지 않는다. → 감로법회 참고문헌 : 『朝鮮の類似宗敎』(村山智順 朝鮮總督府 調査資料 第42輯 1934)

2025-06-30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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