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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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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단군기원은 1907년 나철이 대종교를 일으키면서 연호로 채택하였으며 48년 대한민국정부 수립과 함께 이를 공용 연호로 하는 법률이 반포되기도 했다. 1962년 1월 1일 폐지되었었으며 이후 서력기원이 공용 연호로 쓰이게 되었다.

2025-07-01 2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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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숭녕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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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단체는 이담이 단군을 숭봉함으로써 민족주체의식을 양양할 목적으로 1945년 단군전봉공회를 설립한 데서 비롯되었다. 1958년 단군전봉공회를 단군숭령회로 명칭 변경하여 문교부의 인가를 얻었으며 서울에 본부를 두고 활동했다. 1961년에는 본 단체 산하에 전국의 단군숭봉단체를 통합할 것을 결의하고 사단법인 단군숭령회중앙본부의 간판을 달고 ‘민족주체의식의 신소생운동(新蘇生運動)’을 벌였다. 1966년에 조경한(趙擎漢)이 회장에 취임하여 전국의 무격단체(巫覡團體)까지 포섭하여 한때는 150여 개 지부에 수십만 명의 회원을 두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 『한국신흥종교총람』(이강오 한국신흥종교연구소 1992)

2025-07-01 2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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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성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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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명

2025-07-01 2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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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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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교

묘향산의 단군유적은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단군대(檀君臺) 단군암(檀君菴) 단군굴(檀君窟) 돈오동(頓悟洞) 강무대(講武帶) 천주석(天柱石) 후장암(帿杖巖) 삼성암(三聖菴) 호대(虎臺) 등이 있다. 단군대는 두타봉 서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단군굴에서 산 정상쪽으로 1리 정도 떨어져 있다. 단군의 강림처로 전해오고 있다. 단군암은 단군을 모신 불교 암자이며 돈오동은 단군굴 아래 있는데 ‘돈오’는 단군의 하인 이름으로 단군이 활쏘기 연습을 할 때 돈오가 이곳에서 화살을 수습해서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강무대는 단군굴에서 왼쪽으로 수십보 떨어져 있으며 단군이 무예를 연마하던 곳이다. 천주석은 보현사 동쪽에 있는데 단군이 무예를 ...

2025-07-01 2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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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가계의 삼대지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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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方敎

동방교에서 노광공과 두 아들을 삼위일체를 이룬 절대 신(神)으로 신봉하였고

2025-07-01 0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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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학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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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방불교

1894년 동학농민혁명의 발생을 계기로 발의한 남학의 총궐기 계획.

2025-07-01 0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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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단군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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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효달은 함경남도 신흥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종교에 관심을 가지고 여러 종교를 드나들다가 1942년 서울 필동에 있던 자신의 집에 박혁거세 영상을 봉안하고 신앙생활을 시작하였다. 단군에 대한 신앙은 그 이듬해인 1943년 박혁거세 영상 옆에 단군 영정을 모시면서 비롯되었다. 해방 후 그는 민족의식의 발로에서 국조를 숭봉해야겠다는 신념에서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하여 상교(尙敎)에까지 올랐으며 한때는 삼일원(三一園)의 대덕(大德)으로 일하기도 하였다. 그는 일제강점기 때에 신사(神社)를 짓고 참배를 강요했던 것에 대해 국조를 받드는 단군전을 지어 민족의식을 고양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1957년 남산의 굴속에 단군상을 봉안하 ...

2025-07-01 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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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정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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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교

나정련은 1882년 9월 15일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 칠동리 금곡에서 나철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호는 염재(念齋). 어려서 한학을 공부하였으며 가업에 종사하다가 1905년 경성 초동으로 이사하였다. 1910년 부친이 대종교를 중광하자 입교하였고 부친을 시봉하였다. 1911년 영계(靈戒)와 참교(參敎)를 받았다. 1914년 만주 연길현 의란구로 이주하여 계몽운동에 참여하였고 1916년 지교(知敎)를 받았다. 1920년에는 구룡(九龍)학교의 교장으로 임명되어 2년간 민족교육에 헌신하였다. 1941년에는 당시 대종교총본사가 있던 옛 발해수도 영안현 동경성(東京城)으로 이주했으며 경의원 참의(參議)에 피임되었다. 1942년 ...

2025-07-01 0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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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인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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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

평안남도 동학농민혁명을 이끈 주도적 인물. 1919년 3.1운동 민족대표의 한 인물. 생애 및 활동 : 나인협은 1890년 동학에 입교하여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는 나용환과 함께 평안도 지역의 동학 도인들을 이끌고 동학농민혁명에 참가하였다. 동학혁명 후에는 손병희의 문명개화운동에 찬동하여 동학광고문을 내 문명개화와 정부개혁을 주장했고 포교소를 33개소로 넓혀 농민계몽에 힘썼다. 1919년 2월 25일에는 경성부에서 평안도 지역 천도교 인사들과 함께 손병희 권동진 오세창을 만나 3·1 운동에 참가하라는 권유를 받았고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2월 27일 기미독립선언서 초안에 서명했으며 3월 1일 태화관에서 독립선 ...

2025-07-01 0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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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완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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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

송암 김완규는 구한말 관직에 있다가 1910년 손병희 등의 권유로 천도교에 입교하여 봉도(奉道)·법암장(法庵長) 등을 역임하였다. 1910년 8월 15일 『천도교회월보』를 간행하고 문명개화운동을 주도하는 언론활동을 전개하였고 1910년 9월 1일 일제의 한일 강제 병합을 반대하다가 일본헌병에 체포된 바 있다. 1919년에는 3.1민족독립운동에 대한 계획을 듣고 이에 찬성하여 「독립선언서」에 서명할 것을 동의하고 민족대표로서 참가하였다. 출옥 후 천도교 도사로 종교활동과 민족운동을 계속하였고 1923년 10월 조선의 최초 노동단체인 노동단대회 집행위원을 역임했으며 광복 후 1945년 12월 삼일동지회 고문으로 있으면서 독 ...

2025-06-30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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