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1018건
김낙철
천도교
김낙철은 33세(1890년)에 동생들과 함께 동학에 입도했고 이듬해 3월에는 공주군 신평리에서 호남도인 남계천 김영조 김낙삼 김낙봉(弟) 손화중 등과 함께 최시형을 배알하고 직접 지도를 받았다. 이 당시 부안지역에서 동학에 뛰어든 사람들은 무려 수천 명에 달했는데 이를 주도한 이들이 김낙철을 비롯한 부안김씨 문중 출신들이었다. 1893년에는 복합상소 운동에 참여했고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부안 대접주로서 부안에서 봉기하였다. 집강소 통치기에는 부안에 2개소의 도소(都所)를 설치하여 관내 치안유지에 기여하였다. 특히 이 당시 미곡을 구하러 온 제주도 어민들이 무사히 미곡을 구할 수 있게 도와줌으로써 1894년 ...
2025-06-30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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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낙원
증산교오동정파
증산교오동정파를 창립한 김낙원(金洛元 1890-1973)은 1890년 2월 29일 전라남도 영광군 군남면에서 김응보(金應輔)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가 전라북도 부안군 해재면 송석리 속칭 봉리(峰里)가 길지(吉地)라 하여 그곳으로 이사하니 거기서 자랐다. 그의 부친은 치산을 잘하여 400여석을 받는 부농이었다. 김낙원은 지술(地術)을 잘 아는 김태수가 증산 강일순을 믿고 태을주를 읽어야한다는 말을 듣고 1915년 보천교에 입교했다. 1916년부터 손바래기에서 증산의 부인인 정부인을 3년간 모셨고 증산의 생전 제자들인 김형렬 등 5-6명과 친교를 맺으며 증산의 사상을 배웠다. 1918년 순천에서 안내성을 만나 함께 ...
2025-06-30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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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천
1916년 김광선(金光旋)을 통해 소태산(少太山)에게 귀의한 9인제자 중 한 사람으로 원불교 초기교단 형성과정에서 저축조합·방언공사(防堰工事)·혈인기도(血印祈禱) 등에 참여했다. 김기천 15세시에 김순천(金順天)과 결혼했으며 17세부터 한문 서당 훈장으로 근동 아이들을 가르쳤다. 김광선의 인도로 소태산 문하에 귀의하여 저축조합 방언공사 법인기도에 동참했다. 1924년(원기9)부터 4년간 영광지부 서무부장 겸 지부장으로서 살림을 전담했다. 1928년(원기13)에는 익산총부 서무부장에 피임되어 2년간 근무했고 1930년(원기15)에는 총부 교무부장 이듬해에는 선원 교무로 해박한 지식과 명철한 지혜로 선원들을 일깨웠다. 김기 ...
2025-06-30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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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선
감로법회
금강산 건봉사(乾鳳寺)의 포교사로서 1925년 중앙포교원(中央布敎院 당시 경성부 이화동 1)에 부임한 김기선(金基瑄)은 매월 24일 관음제일에 모인 신자들을 중심으로 감로법회를 조직하였다. → 감로법회 참조 참고문헌 : 『朝鮮の類似宗敎』(村山智順 朝鮮總督府 調査資料 第42輯 1934)
2025-06-30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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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선
감로법회
925년 감로법회를 창교한 인물이다. 그는 원래 금강산 건봉사(乾鳳寺)의 포교사였다고 하며 동사의 중앙포교소(당시 경성부 이화동 소재)에 재임 중에 매월 24일 관음제일에 모인 부인들을 주축으로 감로법회를 조직하였다. 이외에 자세한 행적은 전하지 않는다. → 감로법회 참고문헌 : 『朝鮮の類似宗敎』(村山智順 朝鮮總督府 調査資料 第42輯 1934)
2025-06-30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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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동
베뢰아파
1987년 ‘기독교남침례회’라는 이름으로 베뢰아파라는 종파를 창시한 인물. 생애 및 활동 : 그는 1938년 6월 25일 충남 서산에서 태어났다. 예산 감리교회에 출석하여 기독교신앙에 입문하게 되며 평신도 부흥사로 1963년 예산 근처의 비봉교회에서 목회 책임을 맡았다. 이후 1969년 11월 30일 개척교인 7명과 함께 성락교회를 설립하고 창립예배를 시작으로 적극적인 선교 활동을 하게 된다. 1973년에는 베뢰아 아카데미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신학생 토요성경공부가 시작되었다. 이 모임은 1978년에 베뢰아아카데미로 발전하였다. 여기에 김기동 목사 자신이 원장으로 취임하게 된다. 1987년 9월 30일 기독교한국침례회 ...
2025-06-30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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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보
단군성주교
김근보(金根寶 1911-1977 호 新谷 雲寶)는 단군성주교의 제2대 교주이다. 1960년 단군성주교를 창립한 강승태가 사망하자 김근보가 2대교주로 취임했다. 그는 1911년 제주도 애월읍 광령리에서 태어나 일찌기 강승태의 도에 입도 하여 강승태가 사망 당시 단군성주교 본소 원장직을 맡고 있다가 2대 교주가 된 것이다. 법통 계승과정에서 이백환ㆍ김승례(이들은 동도법종금강도를 세움) 등과 심한 마찰을 빚기도 했다. 그는 법통체계 계승을 위한 많은 저술을 하며 교단을 이끌다가 1977년 사망했다. 김근보의 저술로는 『도덕경의문(道德警宣文)』ㆍ『성도정기기성운집(成道定機祈誠運集)』ㆍ『천지인합기대요(天地人合機大要)』 등 20여권 ...
2025-06-30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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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연
무법대
김구연은 1938년 경기도에서 출생하였으며 자신이 조선조 김종서장군의 후손이라고 자부하였다. 그는 8세 때에 도에 뜻을 두고 입산해서 찬운도사(餐雲道士) 도석선생(道石先生)이라는 분의 지도를 받아 천문과 지리에 통달했다고 한다. 그러나 도석선생은 형체를 나타내지 않는 신비의 존재로 그에게 계시만 내려주었는데 계시에 의하면 머지않은 미래에 후천의 새 시대가 개벽될 것이며 이때 김구연이 개천궁(開天宮)의 영도자가 될 것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김구연은 자신이 천자(天子)의 직성(直星) 자미성(紫微星)의 정기를 받았다고 해서 무자(戊字)를 따다가 ‘무법대(戊法臺)’를 짓고 자신의 호를 무송(戊松)이라고 했다. 김구연은 때로 소 ...
2025-06-30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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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교헌
대종교
1868년 7월 5일 경기도 수원 구포에서 부친 창희(昌熙)와 모친 풍양 조씨 사이에서 출생하여 한성부에서 성장하였다. 자는 백유(伯猷) 호는 무원(茂園). 교단에서는 무원종사(茂園宗師)로 부른다. 성균관 대사성을 역임하였으며 1916년 나철에 이어 대종교 도사교가 되었다. 생애 및 활동 : 1885년에는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벼슬은 병조참의 예조참의를 거쳐 성균관 대사성에 이르렀다. 1898년에는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계몽운동을 하였고 대표위원이 되어 만민공동회 운동을 전개했다. 1906년 부산항재판소 판사와 동래부사에 재직할 때 통감부의 비호 아래 자행되는 일본인들의 경제침탈에 맞서다가 정계에서 추방되었다. 그 뒤 신민 ...
2025-06-30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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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교신
기독교/기타
김교신은 나이 12살에 한매(韓梅)와 결혼하고 19살이 되는 1919년에 함흥 공립농업학교를 졸업했다. 이 해 3·1운동이 발발하자 태극기를 만들어 예배당과 보통학교에 보내며 3월 3일의 함흥 장날의 만세 시위를 주도했다. 3.1운동 학생 주모자로 몰려 체포되어 고초를 겪다가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이후 일본에 가서 토쿄의 세이소쿠(正則)영어학교에 입학했고 1922년에는 동경고등사범학교에 진학했다. 1920년 6월에 기독교에 입신했으나 교회의 내분에 실망하여 1921년 1월부터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 1861-1930)의 성서연구회에 출석했다. 우치무라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교회에 소속 여부나 특정한 예식의 수행 여부 ...
2025-06-30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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