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1870건
박중빈
원불교
박중빈은 어려서부터 우주 변화의 원리와 세상의 이치에 대한 관심이 지극하여 이를 탐구하는 구도 고행생활을 하다가 1916년 4월 28일 깨달음을 얻었다. 그는 깨달음의 경지를 “만유(萬有)가 한 체성(體性)이며 만법(萬法)이 한 근원이로다. 이 가운데 생멸없는 도와 인과보응되는 이치가 서로 바탕하여 한 두렷한 기틀을 지었도다”라고 밝혔다. 그는 당시 시대상황을 보고 도탄에 빠진 시대인심을 바로잡기 위해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라는 개교표어를 내걸고 본격적인 교화사업을 시작하였다. 그는 과거 성현들의 깨친 바를 참조하기 위해 각 종교의 경전들을 구해보던 가운데 『금강경』을 보고 “석가모니불은 성인들 중의 성인이 ...
2025-07-08 2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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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승
천도교
박준승은 1890년 4월 23일에 입도하여 1897년에 접주(接主)가 되고 이어 도집 교령을 지냈다. 1907년 12월 임실군 창립교구장을 지냈고 1908년 수접주 1909년 임실군 의사원 1910년 교훈 도훈 및 호남교구 순회감독 1912년에 전라도 순독원 1914년 장성군대교구장 1918년 총부도사실 도사로 활동했다. 1919년 3.1운동 당시 33인 대표의 1인으로 참가하여 유태홍·박영창·김의규에게 독립선언서 5000매를 배부하고 장성·남원·임실 등지에서 궐기하게 하였다. 2년간 옥고를 당한 후 출옥하여 포덕사 및 종법사를 역임하다 정읍군 산외면 정량리에서 병사하였다. 묘소는 정읍시 북면 마정리에 안장했다가 196 ...
2025-07-08 2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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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석
보천교
1864년에 전라남도 진도군 동면(옛 지명)에서 태어난 박주석(朴周錫)은 1918년 10월에 제주도 한라산 산록의 법정사(法井寺)에서 승려 김연일(金連日)·방동화(房東華) 등과 함께 항일 무장봉기를 계획하였다. 박주석은 선봉대장으로서 인근 마을 주민 수백 명과 함께 서귀포 중문리의 경찰 주재소를 습격했다가 체포되어 징역 7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 목포 감옥에서 옥사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에 그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보천교연혁사(상·하)』(보천교중앙총정원·협정원·총령원 1948) 「濟州 法井寺 항일항쟁 연구」(안후상『종교학연구』제15집 서울대종교학연구회 1996) http://e ...
2025-07-08 2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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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간
단군마니숭조회
박종간은 1943년 5월 20일 충청북도 천안시에서 출생하였으며 충북 괴산군 칠성면 갈매마을에서 성장했다고 한다. 유학자 집안의 딸로 태어났으나 5세 때부터 영안이 열려 신명을 보았다고 하며 남의 점을 쳐주기도 하고 돌아 올 일을 예언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고지식한 한학자였던 아버지는 유학자 집안에서 무당이 났다고 구박을 하였으며 제대로 교육도 받지 못한 채 일곱 차례나 이사를 다녔다고 한다. 19세 때에는 조봉진(趙鳳振)과 결혼하여 2남 2녀를 두고 가정생활을 하기도 하였으나 그녀의 영기는 없어지지 않았고 영(靈)을 보는 것을 사람 보듯이 하며 특히 조상의 영을 잘 보았기 때문에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19 ...
2025-07-08 2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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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내원
천도교
박내원은 동학의 대접주(大接主) 박광호(朴光浩)의 아들로 16세에 보성보통학교를 졸업(1917년)하고 YMCA에서 2년간 수학한 뒤 천도교청년회 중앙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1년 경성 대동인쇄 문선공으로 일하면서 인쇄공노조를 결성하고 집행위원이 되었다. 또한 사회주의 계파 중 화요회에 속하여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 및 고려공산청년회(高麗共産靑年會)와 관련을 맺고 서울인쇄직공청년동맹과 조선노동총동맹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5년 12월 화요회가 주도하는 제2차 조선공산당이 결성되자 노동총동맹에서 활동하였고 1926년 사회주의자들과 함께 천도교 대표로서 6.10만세운동을 추진하다가 체포되어 5년간 옥고를 치렀다. 출 ...
2025-07-08 2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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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남수
동도교월평교회
박금수(朴金洙)와 함께 1967년 증산계 신종교 동도교월평교회(東道敎月坪敎會)를 창립한 인물.
2025-07-08 2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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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홍
관성교(關聖敎)
박기홍의 구체적인 생애는 알려진 바가 없으나 1920년 김용식(金龍植)과 함께 종래의 관제(關帝)를 숭배한 숭신단체 전내무(殿內巫) 및 일반 민중을 교도로 하는 관제숭배자를 규합하여 관성교를 조직하였다. 박기홍은 전내무 등에 의해 잘못 전해진 관제의 교를 교정하는 한편으로 관제의 충렬용의(忠烈勇義)로써 민중을 선도하려고 하는 취지요령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 『朝鮮의 類似宗敎』(村山智順 저 최길성․장상언 공역 계명대학교출판부 1991)
2025-07-08 2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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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하이전국신성회
바하이력에 따라서 19일마다 축제를 갖는다. ‘19일 축제’는 기도와 경전낭독 협의의 시간 친교의 시간으로 구성된다. 바하이공동체는 신년축제 노루즈 바하올라의 선언을 기념하는 레즈완 축제 바압 선언일 바하올라 승천일 바압 순교일 바압과 바하올라의 탄신일을 ‘9대 성일’로 기념한다. 바하이는 공동체의 운영을 위해 자발적으로 헌금을 낸다. 경전 : 바하올라의 육성을 통해 하느님의 계시가 내렸다고 믿는다. 아랍어로 계시된 <카타베 악다스>(지성서) 윤리적 가르침을 담은 <숨겨진 말씀> 신학적 가르침을 다룬 <케타베 이깐>(확신의 서) 등이 있다. 참고문헌 : 「종교적 방향성과 칼 융의 원형: 한국 이슬람과 바하이신앙을 중심으 ...
2025-07-08 2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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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하울라
바하이교
바하올라는 1817년 오늘날 이란의 수도인 테헤란에서 출생했다. 본명은 미르자 후세인 알리 누리(Mírzá Ḥusayn-`Alí Núrí)다. 27세가 되던 해에 바하울라는 바압의 종교운동에 참여해서 핵심적인 지위에 올랐다. 바압의 종교단체에게 탄압을 받던 1850년대에 그는 자신이 신의 전령사임을 알리는 신의 계시를 받았고 1863년 바그다드 체류기에 자신을 따르던 추종자들에게 그 사실을 공개적으로 알리고 바하이교를 설립하였다. 1868년 오스만제국에 의해서 바하울라와 그의 추종자들은 아카(`Akká)로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아들을 잃는 고통을 겪었다. 술탄의 사후에 자유를 얻은 바하울라는 말년에 바흐지(Mansion ...
2025-07-08 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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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불교연구소
1980년대 대한민국은 사회 전반에 걸쳐 혼란스러웠다. 불교계는 해결이 쉽지 않은 종단의 지속적인 분규가 진행되고 있었고 치욕적인 10.27법난(法難)이 발발하기도 했다. 당시의 법난은 정권을 장악하기 시작했던 신군부세력이 불교계 정화를 추진했던 사건이었다. 불교계의 자기성찰과 개혁이 필요한 명분을 제공해주는 사건이기도 하였다. 때문에 당시 불교개혁은 종단·불교단체·승려·재가불자 등 불교계의 모든 구성원이 공감하고 있었다. 민족불교연구소는 이와 같은 시대상황 속에서 태동하였다. 더욱이 1983년 8월 6일 발생한 신흥사 승려의 살인사건은 종단·신도회·언론·신도들로 하여금 문제점의 해결을 위한 대책을 다양하게 개진하게끔 ...
2025-07-08 2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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