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3974건
인도교
인도교(人道敎)를 창립한 채경대(蔡慶大, 1890~1940, 호 龜岳)는 1890년 12월 9일 전라남도 무안군 비금면 지당리에서 태어나 1914년 보천교에 입교, 최고 간부가 되었다. 그러나 1922년 증산 강일순의 탄생지인 객망리에 성전을 짓고 천인교(天人敎)라 이름하여 독립했다. 1936년 조선총독부는 증산계 각 교단에 대해 대 폭압령을 내렸다. 국내에서 증산교운동을 전개할 수 없게 되자 이해 여름에 만주에 들어가 농장개설과 교인촌(敎人村) 건설을 준비하고 교인 600여 세대로 신농사(神農社)라는 조직을 하여 만주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계속 일제에 쫓겨 봉천성 강평현 박인촌(博仁村), 통화성 유하현 대전자촌(大甸子 ...
2025-10-08 2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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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도
기독교/기타
1915년 송도한영서원에 입학한 뒤 민족의식에 눈떴다. 1919년 3.1 운동에 가담한 뒤 1923년까지 여러 차례 독립운동을 했고, 그로 인해 거의 3년여에 걸친 옥살이를 하였다. 어머니의 영향으로 1916년 기독교 신앙의 세계로 들어갔고, 1919년 6월 4일 송봉애(宋鳳愛)와 결혼했다. 그 뒤 큰아들 영철(永哲)을 포함해 모두 오남매를 두었으나 영철을 제외한 넷은 일찍 사망했다. 이용도는 주체적 종교성에 입각해 자주적 삶을 살아가려면 기독교 공부가 필요하다고 느끼고서 1924년 협성신학교(현 감리교신학대학교) 영문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신학교에서 그가 본 것은 힘의 논리에 따라 움직이던 미국 선교사들의 친일적 행보 ...
2025-10-08 2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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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세복
대종교
윤세복의 본명은 세린(世麟)이며 1881년 경상남도 밀양에서 출생하였다. 도호는 단애이며 교단에서는 단애종사(檀崖宗師)라고 부른다. 어려서는 고향에서 한학을 공부했으며, 고향의 신창학교와 대구의 협성중학교에서 5년간 교편을 잡다가 1906년부터 대구에서 수학(數學)을 공부했다. 1910년 12월 서울에 올라와 대종교에 입교하였다. 시교사(施敎師)가 된 후 친형인 윤세용(尹世茸)과 상의, 가산 수천 석을 정리하여 만주로 건너가 환인현에 교당을 설립하여 포교에 힘쓰는 한편, 환인현에 동창학교(東昌學校), 무송현에 백산학교(白山學校), 밀산당벽진에 대흥학교(大興學校), 영안현 동경성에 대종학원(大宗學院)을 설립·경영했다. 1 ...
2025-10-08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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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성
대순진리회
대순진리회 도인들이 월 1회 자발적으로 내는 성금. 대순진리회에서는 개인이 낼 수 있는 월성은 월 10만원 이하로 제한하고 있음.
2025-10-08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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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음방송
원불교
1975년 이후 원불교는 새로운 발전을 이루기 위하여 문화교화를 이끌어 갈 주요 정책의 하나로 방송국 설치와 운영을 추진하였다. 그리고 1989년 7월 26일 제4회 임시원의회에서는 ‘원불교방송국설립준비위원회’(위원장: 이광정)를 발족하고 원불교방송국의 설립에 대한 논의와 작업을 추진하여 왔다. 결국 1996년 원음방송추진위원회는 방송국 설립허가를 촉구하는 건의문 작성과 서명작업에 착수했으며, 원음방송의 정식 명칭을 원음방송(WONBUDDHISM BROADCASTING)으로 하고 약칭을 WBS로 표기했다. 1997년 12월 4일에는 재단법인 원음방송 설립 및 방송국 추천서 발급을 공보처에 신청했으며, 12월 15일 공보 ...
2025-10-08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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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신문사
원불교
1968년 4월 4일 교정원 교화자문위원회에서는 신문발간연구위원회 구성건의를 결의하고, 5월 11일 ‘신문발간연구자문위원회’를 발족했다. 이듬해인 1969년 3월 1일 원불교의 대내적인 성장과 일원대도의 대외적인 선양을 통해 인류사회의 발전을 도모한다는 목적과 취지 아래 ‘원불교신문사’가 설립되었다. 5월 27일 문공부에 ‘원불교신보’라는 명칭으로 등록을 필했고, 한국주간신문협회에 가입했다. 6월 1일 《원불교신보》 창간호를 발행했다. 격주간, 월 12면 발행으로 타블로이드판 인쇄로 발행되었으며, 발행인 박장식, 편집인 김정용, 주필 이공전, 편집국장 조정근이었다. 1971년 1월 1일 격주간 월 12면에서 16면으로 ...
2025-10-08 0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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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음정의
남학계
이운규는 자신이 살아가던 당시가 말세적인 재겁(災劫)의 시대라고 규정하였으며, 이 재겁의 시대가 지나가고 나면 무궁한 극락의 세상, 곧 지상선경이 건설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재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유·불·선 삼교의 가르침에 따라 인간개조를 행할 필요가 있다고 하였다. 그는 특히 인간개조를 위한 수행의 방법으로 오음주(五音呪)를 외는 주송수련(呪誦修鍊)을 해야 한다고 하였으며, 이를 오음정의(五音正義)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오음정의는 이후 김항의 일부계 신종교 대부분이 오음주를 수행하는 등 신종교의 신행에 크게 영향을 끼치게 된다. 1912년 간행된 이능화(李能和)의 『백교회통(百敎會通)』에서도 대종교(大宗敎) ...
2025-10-07 2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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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관
동학/천도교
1905년 손병희는 동학을 천도교로 개신한 후 종교적 근대화를 시도하게 된다. 그 중 수행과 관련하여 모든 천도교인이 지켜야할 다섯 가지 의무조항을 신설하게 되었는데 그 다섯 가지는 주문, 청수, 시일, 성미, 기도이다. 주문은 21자 주문으로서 이것을 ‘지극히 하느님을 위하는 글’이라고 하여 모든 교인들에게 외우게 하였다. 청수는 모든 행사와 의식을 거행할 때 맑은 물을 모셔다 놓고 뚜껑을 여는 절차이다. 청수는 마음 안에 맑고 맑은 한울님이 기운이 가득 차 있음을 깨달으라는 의미이다. 시일은 일요일 날 모두 다 함께 종교적 의례를 수행하는 의식이다. 성미는 매번 밥할 때 가족 숫자대로 한 술씩 쌀을 따로 떠 놓았다가 ...
2025-10-07 2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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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가무도교
본교의 창시자인 송철화는 김항의 제자가 아니며, 1950년 발발한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참혹한 현실에서 인생의 문제를 고민하다가 우연히 『정역』을 알게 되어 연구하게 된 것에서 시작된다. 그는 『정역』을 해득하던 중 득도를 하게 되는데, 당시 일부계통의 신종교가 점점 쇠미해짐을 안타까워하면서 1960년 스스로 충남 논산시 두마면 향한리의 향적산 아래에 ‘허공산제당’을 짓고 사람을 모아 수련과 공부를 시키기 시작하였다. 주된 사상은 김항의 정역사상을 근간으로 하며 신앙의 대상은 상제, 천황, 지황, 인황, 미륵, 신령, 하나님, 천도 등으로 다양하게 불렸으나 직접적으로는 김항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본교에서는 김항이 사후 은 ...
2025-10-07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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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가무도교
김항의 사망 후 교단이 여러 교파로 분립될 당시, 김항의 제자였던 진상교는 충북 옥천군 군서면에 따로 교단을 창립하고 종교활동을 시작하였다. 진상교의 사망 후 그의 아들인 진기태(陳基泰)가 그 뒤를 이었으나 교세는 극히 미약하였다. <참고문헌> 『한국신흥종교총감』(이강오, 한국신흥종교연구소, 1992)
2025-10-07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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