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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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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교

대종교에서는 창립 후 백두산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으로 나누어 각각 도본사를 두도록 하였다. 1914년 남도본사를 경성(담당: 강우) 동도본사를 동간도 청파호(담당: 서일) 서도본사를 상해(담당: 신규식 이동녕) 북도본사를 노령 소학교(담당: 이상설)에 설치하였다. 해방 후에는 남한을 관할하는 남도본사만이 현존하고 있다. 따라서 대종교에서는 남1도 남2도 남3도 남4도로 구역을 나누어 각 곳에 도본사를 설치하였고 부여와 성주 부산 광주 밀양 상주 공주 등에 지사(支司)를 두었으며 각지에 시교당을 두고 포교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2025-07-01 0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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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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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교

나정문은 1891년 11월 28일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 칠동리 금곡에서 나철의 둘째아들로 출생하였다. 호는 일도(一島). 어려서부터 한학을 공부하였고 1909년 서울 선린상업학교를 졸업하였다. 이후 원산농공은행에서 2년 성진척식은행에서 6년간 근무하였다. 1909년 부친 나철에 의해 대종교가 중광되었을 때 입교한 이후 참교(參敎)·지교(知敎)·상교(尙敎)로 승질되면서 총본사에서 교적간행회(敎籍刊行會) 총무 천전건축주비회(天殿建築籌備會) 발기인 등 중책을 맡았다. 1942년 일제의 대종교 탄압을 위한 조작에 의해 발생한 임오교변으로 11월 19일 일본경찰에 검거되어 영안현서(寧安縣暑)를 거쳐 목단강경무처에 구금되어 15 ...

2025-07-01 0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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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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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불교법화회

법회계 신흥 종단의 탄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대승불교법화회(大乘佛敎法華會)의 초대 교령이었다. 그는 1898년 경기도 수원시 복수동에서 태어났다. 매우 병약하였으며 불우한 유년시절을 보낸다. 19세에 불교에 귀의하여 관악산 망월사에서 수련하고 21세에 수원의 용주사에서 임성진(林性眞)화상을 은사로 수계 득도하였다. 병고와 생활고에 시달리면서도 신교육을 받아 26세에 신풍공보를 졸업하였다. 『법화경』에 심취하며 병고를 극복한 그는 묘법을 얻고 1927년 수원시 복수동에 묘수사(妙壽寺)를 세운다. 그는 이후에도 철저한 기도정진을 계속하였는데 일본 승려 본문불립강(本門佛立講)의 야스다[安田]와 본문법화종(本門法華宗)의 우에 ...

2025-06-30 2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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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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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기독교회

그는 1918년 봉산(鳳山) 신원교회(新院敎會)를 맡고 있으면서 장로교가 선교사의 주도아래 구태의연한 보수주의 신학에 매몰되어 있다고 비판하고 조선적 신학과 자유로운 신학연구를 이끌며 기성교회로부터 자치를 선언한 인물이다. 그의 이러한 활동은 서구의존적인 신앙과 신학에서 벗어나고자 했다는 점에서 한국의 기독교사에서 신앙과 신학의 토착화운동의 흐름과 같은 맥락을 형성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김장호 외에 김종태(金鐘台) 현성원(玄聖元) 등도 조선기독교회를 주창하였다. 그러나 반선교사와 반교권(反敎權)이라는 그들의 좋은 취지의 활동에도 일제치하라는 상황 때문에 친일로 기울어질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었다.

2025-06-30 2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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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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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불교

김해사람으로 일찍이 오방불교를 창시한 김광화에게서 도를 받았다. 그러나 김광화가 사망하고 김경배가 대를 잇자 이에 대항하여 1895년경 전북 진안군 주천면에서 금강불교를 세웠다.

2025-06-30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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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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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신도

김석열은 1912년 1월 18일 서울에서 출생했다. 한국전쟁 때 난리를 피해 대전으로 내려가 자리를 잡았으며 한의학을 공부하여 대전시 중구 오류동에서 한의원을 개원하였다. 그는 불교와 기독교 등 여러 종교를 전전하였으나 만족을 얻지 못하고 말살되어가는 민족얼과 민족주체성을 어떻게 회복할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다가 1984년에 삼신도를 창립하였다. 특히 그는 당시 ‘한세계인류성도종’의 창립자였던 정근철과 손을 잡고 『일신경(一神經)』을 간행하는 등 많은 저술활동을 통해 한민족의 위대성과 민족주체성을 고양시키고자 하였으며 또한 정근철과 함께 ‘하느님 명호도용 및 단군성조의 경칭 침해 배제 청구의 소’(92가합 71999호 사 ...

2025-06-30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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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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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교

김서종은 1893년 6월 13일 경상남도 함안군 칠원면 구성리에서 출생하였다. 1905년 보성전문학교 법과를 졸업하고 양원(養源)여학교에서 3년간 교편을 잡았다. 그 후 영남 각자의 동지들을 규합하여 영우저축회(嶺友貯蓄會)를 창설하였다. 1922년 북만주 빈강성(濱江省) 오상현(五常縣)으로 이주하여 큰 농장을 경영하였으며 하얼빈에서 ㈜북만농구공사(北滿農具公司)를 창설하여 재만 교포들의 복지향상을 위해 노력하였다. 1915년 대종교에 입교하여 이듬해 참교(參敎)가 되었고 나철이 삼성사(三聖祀)에서 민족의 비운과 교세의 어려움을 스스로 책임지고 순교할 당시 그를 수행하였다. 그 후 지교(知敎)와 상교(尙敎)로 승질(陞秩)하 ...

2025-06-30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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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능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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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심교정원

김능복은 1940년 황해도 현성군 금산면 감수리에서 태어났다. 한국전쟁 당시 월남하여 익산군 함라면 신대리에 살며 초등학교와 중학을 졸업했다. 중학 2학년 때인 1969년 본원 창설의 원리인 「삼심대(三心大)」를 경험하게 되었다고 한다. 중학교 졸업 후 여러 종교를 편력하며 다니다가 군에 입대하여 1957년 제대하고 전북 익산군 함라면 신대리에서 윤불물십본지(圇佛物十本地:念佛宗)란 교명으로 문공부에 사회단체 등록을 했다. 그 뒤로도 원불교 · 통일교 · 삼각산 · 구복암 · 팔공산도덕암 · 대전기원정사 등을 돌아다니며 다른 종교의 교리사상을 섭렵하고 수양도 했다. 1978년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2025-06-30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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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교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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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기타

김교신은 나이 12살에 한매(韓梅)와 결혼하고 19살이 되는 1919년에 함흥 공립농업학교를 졸업했다. 이 해 3·1운동이 발발하자 태극기를 만들어 예배당과 보통학교에 보내며 3월 3일의 함흥 장날의 만세 시위를 주도했다. 3.1운동 학생 주모자로 몰려 체포되어 고초를 겪다가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이후 일본에 가서 토쿄의 세이소쿠(正則)영어학교에 입학했고 1922년에는 동경고등사범학교에 진학했다. 1920년 6월에 기독교에 입신했으나 교회의 내분에 실망하여 1921년 1월부터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 1861-1930)의 성서연구회에 출석했다. 우치무라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교회에 소속 여부나 특정한 예식의 수행 여부 ...

2025-06-30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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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갑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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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불교법화종

1946년 5월 10일 대각국사 의천을 종조로 하고 『법화경』을 근본경전으로 하는 법화도량 무량사(無量寺)를 서울 성북동에 창건하였고 대한불교법화종을 창종한 인물이다. 참고문헌 : 『한국신종교실태조사보고서』(김홍철․양은용․류병덕 원광대학교 종교문제연구소 1997)

2025-06-30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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