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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성산 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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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대도

1934년 11월 이토암 대성사부가 타계하자 처음에는 충남 연기군 금남면 신촌리에 양례(襄禮)하였는데 1946년에 연기군 금남면 영대리 삼태봉으로 이장하였다가 2001년 충남 논산군 노성산의 훈풍로심(薰風露心; 향내음 바람에 꽃 마음이 드러난 것)혈로 다시 이장하였다. 이곳은 토암 자신이 “만고에 신령스런 지경의 천연성지로다…이곳은 네 선생과 팔사(八士)의 몸이 거처할 땅이니라.”할 정도로 명당대지로 알려져 일찍부터 성지로 꼽혀왔으며 수 십 년간 종단의 숙원사업이었다. 노성산은 일매팔지(一梅八枝)의 형국으로 옥룡자(玉龍子)가 보고 “鷄鳴九曲天將曉하니 馬路春風北麓肥라. 天下名山何處在오. 舞童山下亂花飛”라고 찬탄했다고 한다 ...

2025-07-01 0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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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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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진리회

대순진리회 기도의례 행사시에 사용하는 종이로서 각각 기도주와 도통주 운장주의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2025-07-01 0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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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선북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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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천교

사회단체의 보천교 박멸운동에 이어 내부의 혁신운동으로 위기감을 느낀 차경석이 1926년 2월에 60방주 전원을 해직하고 대신에 전국의 교인 조직을 ‘북선(北鮮)’과 ‘남선(南鮮)’이라는 이름으로 양분하였다. 당시에 북선을 ‘선북교인연합회’라 하고 그 책임자를 임치삼(林致三)으로 남선은 ‘보천교남선총무소’라 하고 그 책임자를 김정곤(金正坤)으로 임명하였다. 남·북선 체제는 같은 해 5월경에 한계가 드러나면서 폐지되었다. 1927년 6월에 60방주제가 부활되었다. 참고문헌 : 『管內最近の狀況說明資料(全北)-普天敎一般』(全羅北道 1926) 『보천교연혁사(상·하)』(보천교중앙총정원·협정원·총령원 1948) 『민중과 유토피아』( ...

2025-07-01 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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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사고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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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교

≪남사고예언서(南師古豫言書)≫ 또는 ≪격암유록(格庵遺錄)≫이라고도 한다. 이 책과는 별도로 <남사고비결>이라는 명목으로 ≪정감록≫에 수록된 예언서가 있다. 이 책은 천기(天機)에 관한 책이라 하여 간행되지 않고 자손들에게 비전되어 오다가 8·15 광복 후 남사고가 예언한 말세가 도래했다고 생각한 자손들이 세상에 공개하였다고 한다. 서두에 저자의 약력이 소개된 뒤 예언서(豫言書)·세론시(世論視)·계룡론(鷄龍論) 등 논 18편 궁을가(弓乙歌)·은비가(隱祕歌) 등 가사 30편 출장론(出將論)·승지론(勝地論) 등 논 10편 말초가(末初歌)·말중가(末中歌) 등 가사 3편이 논과 가사의 순서를 넘나들며 수록되어 있다. 가사는 국한 ...

2025-07-01 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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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경중의약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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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조계종삼화불교

본교는 중국 남경에 위치한 중의약(中醫藥) 대학으로서 1995년 8월 불교조계종의 삼화불교대학과 분교를 채결한 이후 불교조계종 총무원장 혜인(손영모)이 한국총장을 맡고 있다. 참고문헌 : 불교조계종 홈페이지 http://www.shbuddhism.or.kr/

2025-07-01 0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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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흥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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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봉산삼성전

김흥인은 1924년 황해도 개성에서 출생하였다. 11세에 정신에 이상이 생겼는데 이때부터 어떤 신명(神明)이 접하여 모든 것을 지시해 주었다고 한다. 25세에 그 신명의 지시에 따라 개성에 있는 사직단에 삼성각을 짓고 화공(畵工)을 불러 신상(神像)을 그려 모셨는데 어느 날 대종교인이 찾아와 이 신상을 보고 단군상과 비슷하다고 하여 그는 비로소 자신에게 계시를 주는 신명이 단군신명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군 복무를 마치고 인천에서 한약종상을 경영했으나 그보다는 오히려 영적 능력에 의한 치유에 의해 무당으로 더 유명해져서 많은 신자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1956년 10월에 서울 도봉산 암석 아래서 산신제를 지냈는데 ...

2025-07-01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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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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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천교

김홍규(金烘奎)는 국권 상실(1910) 직전에 보천교에 입교하였으며 1919년 대황산록 고천제에서 조직된 60방주 가운데 목(木)에 해당하는 방주였다. 주로 교금 관리를 맡았으며 한때 교금 문제로 1921년 2월에 황해도에서 42일 간 경찰에 구금되기도 하였다. 1921년에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해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보내려 했다는 혐의로 경찰에 체포되어 1922년 4월에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에 그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김홍규의 아들은 유년기에 보천교 증앙본소에서 전통 학문을 공부했다. 이는 뒤에 오대산 월정사로 출가한 승려 탄허(呑虛)다. 참고문헌 : 『보천 ...

2025-07-01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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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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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교본부

김해경은 1950년 전남 무안군 삼향면 옥암리에서 부친 재만(在萬)과 모친 윤금자(尹金子)의 아들로 태어났다. 목포사범대학을 졸업하고 교사로 근무하였으며 군복무 후에는 미용사 약탕기장사 물장사 인테리어 조경사업 등의 일을 했고 ‘목련의 향기’ 등 유행가 작사도 했다. 26세 되던 1975년 6월 어느 날 단군신령(檀君神靈)의 인도에 따라 아차산으로 이끌려 가 그곳에서 단군성령의 명에 따라 3일간 약수만 마시며 눕지도 자지도 않고 앉아 있었다. 2일째 되는 날 한 스님이 올라와서 홑이불과 옥수그릇을 주면서 정성드리는 법을 알려주었고 그 후 49일간 물만 마시며 기도를 계속했다. 기도를 시작하고 1주일째 되는 날 단군성령이 ...

2025-06-30 2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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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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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백교

김판례는 대전에서 태어났으며 일찍이 일본으로 건너가 13년간 거주하였는데 시모노세키[下關]에 살 때 몸에 신기가 있어서 신설(神說)을 토설하였다고 한다. 해방 후 귀국하여서는 일시적으로 기독교를 신앙하였는데 몸이 심하게 괴로워지고 3남매가 병사하고 남편은 객사하는 등 집안에 우환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녀는 대전 보문산에 들어가 기도수련을 시작했는데 이후 신병과 가세가 풀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김판례는 이 모든 것이 단군국조의 은덕이라 믿고 단군초상화를 걸고서 기도를 시작했는데 이때 단백교를 함께 창립한 남편 양준룡을 만나게 된다. 두 사람은 1955년 대전시 대사동 보문산에 불당을 짓고 ‘마곡사본산대전선교소’라고 ...

2025-06-30 2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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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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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문좌(文佐) 호는 심산(心山)·벽옹(躄翁)이다. 1919년 전국의 유림 130여 명이 독립청원서에 서명하여 파리강화회의에 보낸 이른바 파리장서사건을 주도하였으며 이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였다. 1921년부터 『천고(天鼓)』 『사민일보(四民日報)』등의 독립운동지를 발간하였고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를 조직해 군사선전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1925년 국내로 잠입하여 비밀리에 독립운동자금 모금활동을 벌이고 다시 중국으로 출국하였으며 이 때 모금한 자금을 1926년 나석주에게 주어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투척하는 거사를 단행하도록 하였다. 1927년 상하이의 영국인 병원 ...

2025-06-30 2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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