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74

김진성

|

지아교

김진성은 1918년경부터 시베리아 북해도 일본 등을 유랑하던 중 많은 어려움을 겪고 일종의 심령술(心靈術)을 얻었다고 했다. 이 심령술을 바탕으로 1924년 강원도 영월에서 지아교를 창립하게 되었다.

2025-06-30 23:36

9

김주희

|

상주동학교

상주동학교의 창립자.

2025-06-30 23:31

9

김종용

|

용화사

용화사(龍華社)를 창립한 김종용(金宗用 1901-? 호 槿下)은 1901년 10월 1일 전라남도 무안군 지도면 전증도에서 탄생했다. 23세 되던 1923년에 일제 경찰에 들어가 주로 보천교를 사찰하는 임무를 맡아하다가 뜻한바 있어 경찰직을 사임하고 1934년 보천교에 입도했다. 그리하여 차경석의 상담역을 맡아 일했다. 차경석이 죽고 보천교가 해산되자 홀로 증산 강일순을 신봉하는 생활을 했다. 1945년 해방 후 이상호의 대법사에 들어가 총무직을 수행하기도 했으나 이곳에서 나오게 된다. 그리하여 1959년 김제군 금산면 용화동에서 용화대도(龍華大道)를 창설했다. 그 후 간부 100명의 조직에 착수하여 1년 여간 추진하였으 ...

2025-06-30 23:28

9

김완진

|

봉남사파

봉남사파(奉南寺派)를 창시한 김완진(金完珍 1921-? 호 月河)은 1921년 제주도에서 출생했다. 김봉남(金奉南)의 조카였다. 경상남도 기장으로 나와 숙부가 지도하는 물법수련 공부에 힘써 봉남으로부터 월하라는 도호까지 받았다. 김봉남 사망 후 김해 교인들을 모아 자기 집에 ‘봉남사’라는 간판을 걸었다. 한 때 수백 명의 신도를 얻었으나 제주도로 돌아가 불승(佛僧)이 되었다. 아미타불과 봉남을 신앙하였다. 그는 봉남교를 불교적으로 만들어 포교하는 것이었지만 그러면서도 봉남이 가르친 물법치료와 주송수련은 그대로 하였다. 참고문헌 : 『한국신종교실태조사보고서』(김홍철·양은용·류병덕 원광대학교 종교문제연구소 1997)

2025-06-30 16:25

9

김영호

|

원각현원교

그는 원래 임제종의 신자였으며 1929년 불법대회(佛法大會)라는 불교조직을 만들기도 하였다. 1933년 3월 30일 동지들과 함께 원각현원교를 창립하였다. → 원각현원교 참조. 참고문헌 : 『朝鮮の類似宗敎』(村山智順 朝鮮總督府 調査資料 第42輯 1934)

2025-06-30 16:21

9

김영곤

|

중앙대종교

중앙대종교의 창립자 김청탄의 본명. 참고문헌 : 『한국신흥종교총람』(이강오 한국신흥종교연구소 1992)

2025-06-30 16:20

9

김시습

|

유교 불교 도교

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梅月堂)·동봉(東峰) 법명(法名)은 설잠(雪岑) 도호(道號)는 청한자(淸寒子)이다. 유교·불교·도교의 삼교(三敎)를 넘나들며 각각에 정통했던 보기 드문 인물이다.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신동으로 불렸다. 서울 삼각산에서 독서하던 중 1453년 수양대군이 단종을 폐위시키는 사건이 일어나자 책을 불사르고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설잠이라는 이름으로 양주 수락산(水落山) 인제 설악산(雪岳山) 경주 금오산(金鰲山) 등지를 두루 다니면서 많은 시문(詩文)과 소설을 지어 세상의 허무함을 읊었다. 47세 때 잠시 환속(還俗)하기도 했으나 얼마 뒤 다시 서울을 떠나 전 ...

2025-06-30 16:14

9

김시성

|

화랑정신선양회

김시성은 1908년 전남 함평에서 출생하였다. 경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으며 이후 한학을 공부하면서 화랑정신에도 관심을 가지고 수도를 하였다. 1928년 중국으로 건너가 의당(宜堂)이라는 중국인에게 의술을 배우면서도 화랑도와 단군의 풍월도 등에 대해 배웠다고 한다. 이후 스스로 화랑도와 김유신장군 등에 대해 깊이 연구하였고 한편으로는 상해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보내고 독립운동가를 도와주는 활동을 하였다. 해방 후 귀국하여 용산에서 한약업을 하다가 한국전쟁 발발로 충남 예산으로 피난하게 되었으며 1965년 본인이 회장으로 있는 가락김씨 종친회를 통해 ‘화랑사’를 건축하고 단군사상과 화랑정신 특히 김유신장군의 업적을 기리는 ...

2025-06-30 16:12

9

김덕명

|

동학

김덕명은 1895년 금구 용계에서 태어났다. 1886년 동학에 입도하고 그 해 10월 11일 경상도 상주의 화령 근처에 있는 전성촌으로 제2대 교주 최시형(崔時亨)을 찾아가 도를 받았다. 1887년에는 원평에 동학의 도회소(都會所)를 설치하고 포교에 힘썼다. 그는 교조신원운동 과정에서 원평집회의 주역이였으며 1894년 4월 무장봉기 이후 원평지역 농민봉기 황토현 전투에서 주도적 역할을 수행했다. 원평 전투의 패전으로 동학혁명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김덕명은 이후 금산면 장흥리 안정사동에 약 1개월간 숨어 있다가 붙잡혀서 서울로 압송되었고 1895년 3월 29일 전봉준·손화중·최경선·성두환(成斗煥)과 함께 처형되었다.

2025-06-30 15:56

9

김광영

|

삼천일지개태도광사

김광영은 1883년 충남 논산군 가야곡면에서 출생하였으며 16세에 연산군 천호리의 유씨 집안에 출가하였다. 천호리에는 고려 태조 왕건이 건립했다고 하는 개태사의 절터가 있었는데 김광영은 43세 되던 1926년에 꿈에서 관세음보살의 계시에 의해 개태사 터에 묻혀있는 석불 세 구를 발굴하였다. 이듬해에는 남편의 도움으로 매몰되었던 석불을 원래 위치에 복구하고 불당을 지어 자신이 주지가 되었다. 그 이후로 그녀가 주문을 외우고 안수(按手)를 하면 사람들의 질병이 낫는 기적이 일어났고 사람들은 그녀를 도인으로 생각하고 모여들었다. 1945년 해방 후 김광영은 신도들을 모아 용화회를 조직하고 본전에 ‘삼천일지개태도광사’라는 간판 ...

2025-06-30 15:32

9

처음으로 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