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74

충의전

|

삼천일지개태도광사

삼천일지개태도광사를 창립한 김광영은 개태사에 용화회라는 조직을 구성하고 ‘삼천일지개태도광사’라는 간판을 붙였다. 이후 1946년에 용화불을 모시는 ‘삼천지상정천궁’을 건립하였다. 1947년에는 단군을 모시는 ‘창운각’을 건립하였고, 1949년에는 본전 남쪽 정면에 ‘우주당’을 짓고, 그 가운데에 관운장을 봉안하는 ‘충의전’을 건립하였다. 개태도광사는 용화회의 조직과 용화불의 신앙에서 창운각의 건립에 의한 단군신앙으로 그 신앙의 중심이 옮겨갔다는 것을 알 수 있으나, 관세음보살의 계시에 의해 관운장을 모시게 되었다는 것 외에 어떠한 종교신앙적 의미에서 관운장이 신앙의 대상으로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참고문헌> ...

2025-10-11 15:03

4

춘향대제일

|

성덕도

성덕도 대제일. 매년 음 3월 3일 성덕도 창도주를 포함하여 교화활인(敎化活人)하던 교직자(敎職者)들의 영령을 추모하여 향사(享祀)를 행하는 것. 시간은 정오이며 전국 도생이 참례(參禮)를 함.

2025-10-11 14:56

4

축사마귀격살멸독문

|

갱정유도

갱정유도인들은 15일이나 30일 또는 100일 등 특별한 기간을 정하고 전국 각지의 명산에 마련된 수련당에서 특별수련을 시행한다. 특별수련을 하는 동안에는 자시(子時: 밤11시), 묘시(卯時: 새벽5시), 오시(午時: 낮11시), 유시(酉時: 저녁5시)에 수련치성을 드리며, 이 때 다섯 종류의 경문 즉, 5경(經)을 봉송(奉誦)하는데 「축사마귀격살멸독문」은 5경 중 하나이다. 이 경문은 자신의 마음 속 죄악(罪惡)과 세상의 음독(陰毒)을 소멸하고, 양도(陽道)세상의 춘심(春心)을 받아들이라는 내용으로 되어 있으며, 『부응경』에 수록되어 있다. 참고로 5경은 정성(正誠)과 선심(善心)을 추구하는 인간이 천상일기(天上一氣) ...

2025-10-11 14:52

4

축가

|

커발한개천각

커발한개천각에서는 4대 기념일(대영절(大迎節), 광개절(廣開節), 훈민절(訓民節), 개천절(開天節)`을 두고 기념행사를 한다. 대영절은 환웅천황이 신시개천(神市開天)한 것을 기념하는 날이며, 개천절은 단군의 고조선 개국을 기념하는 날로 이 날을 기념하여 천제를 지내는데, 천제의식이 끝난 후 주악(奏樂)과 ‘삼육대례(三六大禮)’를 올린다. 이때 주악이란 축가를 말하는데, 축가에는 대영절축가와 개천절축가가 있다. 두 노래 모두 3절로 되어 있다. <참고문헌> 『한국신흥종교총감』(이강오, 한국신흥종교연구소, 1992)

2025-10-11 01:52

4

최희규

|

진법종

최희규는 1922년 함경북도 학서군 학서면에서 출생했다. 1941년 일본에 유학 후 배일운동을 하다 추방당했다. 귀국 후 천도교에 입문하였다. 해방 후 여러 가지 일을 하다가 1955년에 진보당(進步黨) 조직위원장, 대통령선거운동기획부장 등을 역임했다. 1958년 진보당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기도 했다. 1964년에는 대종교에 들어가 교무원장을 지내기도 했으나 탈퇴하고, 1971년 서울시 도봉구 중계동에서 진법종을 창립하였다.

2025-10-11 01:48

4

최태용

|

기독교

청년기 수원농림학교에 3년 다니는 동안 기독교인이 되었다. 1920년 일본에 건너가 동경영어학교에 입학하였다. 그 곳에서 무교회주의자인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에게 사사하면서 성서연구에 몰두하였다. 1923년 관동대지진사건이 일어나자 『일본에 보낸다』라는 소책자를 펴내 일본의 야만정책에 대한 경고를 하고 이듬해 1924년 귀국하였다. 귀국 후 문서 선교를 하며 다녔으나 신학교육의 필요성을 느껴 장년기에 다시 일본으로 가서 명치학원 신학부를 거처 일본신학교를 38세 때 졸업하였다. 이후 기독교창문사에서 발행하던 『신생명( 新生命)』에 「제도냐 신앙이냐」·「사업이냐 생명이냐」 등의 글을 발표하면서 기성교회에 대한 개혁의도를 ...

2025-10-11 01:46

4

최초법어

|

원불교

최치원은 12살이 되던 868년에 당나라에 건너가 수학 후 과거에 급제하였고, 지방관으로 임명이 되어 황소의 난 때에 이를 격퇴한 공을 세웠다. 따라서 신라에서보다는 당나라에서 크게 이름을 떨쳤고, 헌강왕 11년에 귀국하여 한림학사나 시독(侍讀) 등, 주로 학문 분야를 전담하는 중앙 고위 관직에 종사한 사실이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신라시대 인물로서는 유일하게 개인 문집 『계원필경(桂苑筆耕)』을 남기고 있다. 이는 신라 중기 이래 숭유와 모화(慕華)사상이 지배적이었던 당시에 자연히 정신문화 영역에서 두드러진 인물로 평가될 수 있는 조건이었을 것이다. 또한 「난랑비서문」과 함께 이 부분이 한국 고유의 선교에서 도조로 ...

2025-10-11 01:45

4

최전

|

대종교

원래 이름은 최동식이었으나 대종교 입교 후 최전으로 개명하였다. 호는 동산(東山)이다. 어릴 때 순천 송광사에 금암선사(錦岩禪師)의 문하에 출가하여 경월당 덕민(擎月堂德旻)의 법호를 받았다. 을사늑약이 체결되는 1905년 나철·오기호·이기 등이 조직한 비밀결사인 유신회(維新會)에 참여하여 구국운동에 나섰다. 1909년 정월 보름날 11시를 기하여 한성부 북부 재동 8통 10호의 육간초옥 북벽에 ‘단군대황신위’를 봉안할 당시 제촌보본 대례를 봉행할 때 참여하였으며, 이후 대종교에 입교하여 1911년 1월 지교(知敎), 1914년 상교(尙敎)에 승질되었다. 1916년 사교(司敎)로 특별 승질되어 제2대 교주 후보자 중 한 ...

2025-10-11 01:41

4

최위석

|

서울대법사

서울대법사를 설립한 최위석(崔偉錫, ?~1963)은 일찍이 보천교(普天敎)에 입도하여 보천교 6임 중의 한사람이었는데 보천교를 탈퇴하고 서울에서 독자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8·15해방 후 이정립을 만나 증산교인들을 모아 증산의 치성을 드리자고 상의하고, 8월 20일 신도 40여명을 모아 치성을 올리고 나서 동지들을 더 모아 교단운동을 재개하자고 했다. 그리하여 대순절(9.19 증산탄신일)에 서울 마포구 합정동 자신의 집에서 145명이 모여 대법사를 출범하였다. 그 후 본부를 서울 종로구 필운동에 두고 교단운영을 위한 조직을 단행했다. 이때 그는 대법사의 기획부장이 되었다. 그러나 6·25한국전쟁이 일어나 ...

2025-10-11 01:39

4

최영래

|

대한불교선각종

대한불교선각종의 창종자 최영래(崔永來)는 1914년 5월 2일 경남 통영시 문화동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창령최씨, 모친은 순흥안씨로 11남내 중 막내였다. 1931년 전북 남원의 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통영에서 부친의 가업을 돕다가 전남 해남의 대흥사를 여행하던 중 불법에 매료되어 출가를 결심한다. 그리고 1943년 대흥사 남호각성(南湖覺性)을 은사로 사미계를 받고 득도한다. 법명은 정업(正業)이다. 1949년 35세에 비구계를 수지하였고, 같은 해 봄에는 전남 장성의 백양사에서 만암(曼庵)을 전계사(傳戒師)로 비구계를 수지하였고 법명은 정업, 법호는 영담(映潭)이다. 그 후 전국의 선원과 강원을 돌며 수행 정진하다가, ...

2025-10-11 01:38

4

처음으로 끝으로